90년대 느와르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몇 개 있으신가요? 저는 솔직히 넘버3를 먼저 봤고, 그다음에 초록물고기를 봤습니다. 한석규가 나오는 비슷한 분위기 영화라고 해서 찾아봤는데, 두 영화는 결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넘버3가 블랙코미디 색채가 짙은 오락 느낌이 강했다면, 초록물고기는 훨씬 감성적이고 무거웠습니다. 1997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는, 지금 다시 봐도 촌스러운 화면 속에서 여전히 강력한 몰입감을 줍니다. 요즘처럼 세련된 영상미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 영화를 보면, 오히려 그 투박함이 더 큰 힘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제대 후 돌아온 청년, 그런데 고향은 없더라
초록물고기의 주인공 막동이는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곳은 일산 신도시 개발로 인해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어릴 때 뛰어놀던 들판은 아파트 단지로 가득 차 있고,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방식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막동이는 다시 가족과 함께 식당을 열어 예전처럼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소박하고도 절실한 꿈을 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미애는 알고 보니 조직 보스 배태곤의 애인이었고, 막동이는 태곤의 눈에 띄어 조직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심부름 수준으로 시작했지만, 거칠지만 충직한 성격 때문에 점점 더 위험한 일까지 떠맡게 됩니다. 미애와의 관계가 조금씩 깊어지면서 갈등은 더욱 커지고, 막동이는 조직과 가족 사이에서,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조금씩 무너져 갑니다. 결국 태곤의 명령으로 전 보스를 제거한 뒤 깊은 충격에 빠진 막동이는, 태곤에게 배신당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도 제대 후 복학 전 시간을 보내던 때였습니다. 알바하고 친구 만나고 영화 보고, 딱히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느낌이었습니다. 막동이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다 결국 비극을 맞는 모습이, 당시 제 상황과 묘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올해 초 제 인생에 큰 사건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저도 제게 맞지 않는 길을 걸으며 살았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막동이가 꿈꿨던 것들이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창동과 한석규가 만든 리얼리즘의 시작
초록물고기는 단순히 조직 영화가 아닙니다. 1990년대 후반 산업화와 급격한 도시 개발 속에서 해체되어 가는 가족 공동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의 계층적 절망을 날것 그대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화려한 연출 대신 현실에 바짝 붙어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약자들의 절망을 다듬거나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 오히려 더 강하게 관객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한석규는 그 절망을 온몸으로 연기해 냈고, 화려한 기교보다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연기로 막동이라는 캐릭터를 완성시켰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 특히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막동이가 죽은 뒤 가족들이 모여 그가 그토록 꿈꿨던 식당 '큰 나무집'을 엽니다. 그곳을 찾은 태곤과 임신한 미애. 미애는 식당 앞의 버드나무를 보고 어린 시절 막동이의 사진 속 풍경을 떠올립니다. 오열하는 미애와 달리, 태곤은 끝까지 그곳이 막동이 가족의 식당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아무 설명 없이도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가해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피해자는 혼자 모든 것을 끌어안는 현실의 잔인함이 조용하게 스며들어 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삼 놀란 건, 송강호가 여기에도 나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넘버3에만 나온 줄 알았는데 초록물고기에서도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출연 분량은 많지 않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 두 편의 작품에 동시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 느와르의 제대로 된 시작을 알린 동시에, 한석규와 송강호라는 두 대배우의 출발점을 보여준 영화이기도 합니다.
지금 봐도 낡지 않은 이유
화면은 90년대 질감 그대로지만, 스토리가 주는 무게감과 배우들의 전성기 연기는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즘 한국 영화들이 장르적 세련미를 쌓아온 것과 비교해도, 초록물고기가 가진 날것의 리얼리즘은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운 종류의 힘입니다. 이창동 감독이 이후 발표한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버닝까지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를 보면, 초록물고기에서 이미 그 모든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때문에 중학생이던 당시에는 극장에서 볼 수 없었지만, 성인이 되어 영화라는 매체에 제대로 눈을 뜬 후 만난 이 작품은 제게 단순한 느와르 이상의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먹고살기 바빠서 영화 볼 시간이 없을 때도 있지만, 초록물고기처럼 삶의 무게를 진지하게 다룬 작품은 시간을 내서라도 다시 보게 됩니다. 현재 티빙과 쿠팡플레이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90년대 한국 영화의 진짜 힘이 궁금하신 분들께 꼭 한 번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