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다"는 말, 정말 믿으세요? 저도 30대 초반까지는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각자 삶은 각자가 개척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영화 '접속'을 다시 보고 나니, 이 오래된 명제가 새삼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1997년 개봉한 이 영화는 PC통신과 채팅 문화가 한창이던 시절, 온라인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세이클럽 같은 채팅 사이트로 이성 친구를 만나려던 제 경험과 겹쳐지면서, 지금 40대 중반이 된 저는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답을 내놓게 됐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대사 하나가 지금은 가슴 한 켠을 건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접속이 딱 그런 영화였습니다.

97년 채팅 문화와 한석규라는 배우
영화 접속이 나온 1997년은 채팅이 엄청나게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카카오톡이 대세지만, 그때는 메신저라고 하면 MSN이나 네이트온을 떠올렸고, 채팅은 세이클럽이 유명했습니다. 저도 그 시절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채팅 사이트에서 이성 친구를 만나려고 엄청 노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의 소셜미디어나 데이팅 앱처럼 세련되진 않았지만, 그 시절 채팅창에 낯선 아이디가 말을 걸어오면 괜히 설레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PC통신과 멜로 장르가 섞인 영화라고 해서 어린 마음에 처음 봤는데, 다시 보니 한석규가 나왔더군요.
솔직히 이 부분이 좀 신기합니다. 우리나라 영화가 지금처럼 자리 잡기까지 한석규라는 배우가 제대로 한몫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데, 왜 유명은 하지만 인기는 그렇게 폭발적이지 않은 걸까요. 제가 보기엔 충분히 매력적인 배우인데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접속까지, 그가 출연한 90년대 영화들은 하나같이 시간이 지나도 회자되는 작품들입니다. 아무튼 세월이 지나도 한국 명작 멜로 영화 목록에서 접속이 빠지지 않는 걸 보면, 그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건 확실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멜로 영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접속은 다시 봐도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속에서 동현(한석규)과 수현(전도연)은 노래를 통해 채팅하게 됩니다. 동현의 아이디는 '해피엔드', 수현은 '여인2'였죠. 그들은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동현은 학창 시절 영혜 선배를 만났지만, 영혜는 처음엔 동현의 선배를 좋아했습니다. 결국 동현과 사귀게 됐지만, 군대에 있던 그 선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고, 영혜도 그 선배를 따라 죽었습니다. "영혜가 나를 따라올 줄 알았는데, 그 선배를 따라갔네요"라는 동현의 대사는 사랑의 엇갈림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수현도 마찬가지로 친구의 남자인 기철을 사랑했지만, 기철은 수현의 친구 희진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꼬여버린 사랑의 실타래들이 결국 각자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그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도 영화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돌고 돌아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되는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돌고 돌아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외국 영화나 한국 영화나 이런 내용을 다룬 작품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제 와이프와도 과연 그랬을까요? 제가 살아온 인생이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어도 결국 제 와이프를 만났을까요? 30대 초반만 해도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각자 삶은 각자 개척해 나가는 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40대 중반이 되니 운명이 어느 정도는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직업이 있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예전에 과연 이런 일을 할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는데 그 일로 지금 먹고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에게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요?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연들과 지금 일을 같이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논리가 맞다고 봅니다. 억지로 붙잡으려 했던 관계는 결국 흘러갔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인연들이 지금 제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영화는 여운을 남깁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어'라는 말이 주는 슬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나야 할 사람'을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저희는 종종 나와 인연이 아닌 사람을 '만나야 할 사람'이라고 믿어버리고 쫓아다니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우연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우연히 그가 운명이라 믿고, 필연적으로 비극을 맛봅니다. 제가 손으로 잡으려 했던 무언가는 사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기 전의 환영이었던 것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도 이 영화는 잘 보여줍니다.
너무 비극적인 운명은 저희를 주저앉게 합니다. 동현의 선배들처럼 때론 비극에 이기지 못해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동현처럼 호주로 도피하기도 합니다. 동현을 짝사랑한 은희도 정처 없이 헤매고, 수현은 애초에 비극을 받아들이고 친구의 남자친구를 '바라보기'만 선택했습니다. 그러다 동현과 채팅하며 용기를 냈고, 비극에 다가갔지만 기철도 이내 이것이 더욱 틀린 운명임을 깨닫습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제각각의 방식으로 엇나간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켠에 무언가를 건드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적인 주인공들은 영화 말미에 운명을 만납니다. 마치 운명의 신이 무조건 처음부터 만날 수 없게 다짐한 것처럼, 꼭 한 번씩 비극과 고집을 부리게 한 후, 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 때 야속하게 나타나서 운명의 짝을 알려줍니다. 인생이 참 그렇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백만분의 1 확률로 다가올 수 있지만, 대부분 빗겨 나갑니다. 잡으면 잡을수록 더 멀어지고, 그 간절함마저 잃어버렸을 때 꼭 뒤늦게 나타나더군요.
각본의 힘, 그리고 그 시절이 그리운 이유
더불어 영화의 내공 있는 대본이 참 좋습니다. 최근에는 아무래도 도파민, 화려함, 자극에 집중한 드라마나 영화가 많았습니다. 마치 숏폼을 이어 붙인 듯한 화려한 영화들 말이죠. 그러다 97년의 각본으로 승부하는 영화를 만나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 표현도 좋았고요.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설명 없이도 그 감정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요즘처럼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영화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우연히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테이프에 급하게 녹음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그런 우연히 만나게 되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인연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봅니다.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원하는 것이었구나 하는 걸요. 제 평생 직업, 제 새로운 인연, 그 모든 것들이 다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허망하게 쫓고 울부짖는 애환 가득한 사람에게 이 영화는 위로가 됩니다.
익명이라는 보호막 아래 오히려 더 솔직해질 수 있었던 그 시절, 그 자유가 너무 그립습니다. 접속은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는 타임머신 같은 영화입니다. 아직 보지 못하신 분이라면, 꼭 한 번 시간을 내서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