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 살다 보면 주변 나라 소식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관련 정책 변화는 UAE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사우디에서 발표한 비자 비용 인상 소식이 딱 그런 경우였습니다.
젯다의 알살람궁에서 부국왕 겸 왕세제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가 주재한 주간 각료회의에서 비자 비용 및 일부 교통 범칙금을 대폭 올리는 안이 공식 승인됐습니다. 재정부와 경제기획부가 공동으로 권고한 이 방안은 히즈리력 새해인 1438년 1월 1일, 서력으로는 2016년 10월 2일부터 바로 시행에 들어갑니다. 현지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하면서 꽤 화제가 됐는데, 내용을 보면 그냥 넘길 수준이 아닙니다.
새로운 비자 비용, 얼마나 올랐나
먼저 방문자 비자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단수 비자와 성지순례(핫지·우므라) 비자의 경우 2,000리얄, 우리 돈으로 약 60만 원입니다. 단, 생애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위해 입국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비자 비용을 면제해준다는 예외 조항이 붙어있습니다.
복수비자는 유효기간에 따라 달라집니다. 6개월짜리는 3,000리얄(약 90만 원), 1년은 5,000리얄(약 150만 원), 2년은 8,000리얄(약 240만 원)입니다. 경유비자는 300리얄, 해상 출국 시 적용되는 출국비자는 50리얄입니다.
이미 사우디에 거주 중인 외국인들을 위한 재입국 비자도 바뀝니다. 단수 재입국 비자는 200리얄에 유효기간 2개월이고, 기간을 늘리고 싶으면 1개월당 100리얄을 추가로 내야 합니다. 복수 재입국 비자는 500리얄에 유효기간 3개월인데, 기존에는 같은 500리얄로 6개월을 쓸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혜택이 절반으로 줄어든 셈입니다. 기간 연장은 거주허가증 유효기간 안에서만 신청이 가능합니다.
교통 범칙금도 함께 올랐습니다
비자 비용만 오른 게 아닙니다. 일부 교통 범칙금도 이번 각료회의에서 함께 상향 조정됐습니다.
남의 운전면허증이나 차량등록증을 빼앗거나 담보로 잡다가 적발되면 1,000리얄 이상 2,000리얄 미만의 벌금이 부과됩니다.
교통사고를 내고 현장을 수습하지 않은 채 도주한 뺑소니의 경우에는 10,000리얄 이하 벌금 또는 3개월 미만의 징역, 죄질에 따라서는 두 가지 모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뺑소니 차량을 수리해준 정비소도 처벌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1회 적발 시 최대 50,000리얄, 2회에는 그 두 배, 3회 적발 시에는 2회 벌금의 두 배에 더해 정비소 영구 폐쇄까지 가능합니다.
사우디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져있는 모서리 스키주행이나 위험한 드리프트 같은 스턴트 운전도 이번에 강력하게 손봤습니다. 1회 적발 시 벌금 20,000리얄에 차량 15일 압류, 운전자는 법정까지 서야 합니다. 2회에는 벌금이 40,000리얄로 오르고 압류 기간도 30일로 늘어납니다. 3회가 되면 벌금 60,000리얄에 차량은 완전히 몰수당합니다. 몰수당한 차량 대신 렌터카를 빌리거나 다른 차량을 무단으로 사용하다 걸리면 범칙금이 추가로 붙습니다.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유가가 높을 때는 석유 수익만으로도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유가 시대가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사우디 정부는 저유가 국면이 시작될 때만 해도 7~8년은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지난해 한 해에만 1,000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한화로 100조 원이 넘는 규모입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저렴했던 휘발유 가격을 지난해 기습적으로 대폭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재정 압박은 기업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사우디를 대표하는 건설 그룹인 사우디 빈라덴 그룹과 사우디 오거, 두 곳 모두 6개월 이상 급여를 체불하고 파산설까지 나돌 만큼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사우디 빈라덴 그룹은 메카 크레인 붕괴 사고로 관급공사 입찰 금지까지 겹쳤고, 두 회사 모두 정부 공사를 완료했는데도 대금 지급이 계속 미뤄지면서 현금 흐름에 구멍이 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월급은커녕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소식까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두바이 수익 모델을 벤치마킹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국가들처럼 소득세, 부가세 같은 세금 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사우디 입장에서, 비자 비용과 벌금처럼 수익을 빠르게 늘릴 수 있는 수단을 선택한 것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방향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는 두바이 정부의 수익 모델과 닮아있습니다. 두바이는 석유 수익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각종 라이선스와 수수료, 범칙금을 통해 정부 수익의 80퍼센트 이상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라마단 기간 중 낮에 영업하는 식당은 별도의 영업 허가를 받아야 하고, 빵을 구우려 해도 관련 라이선스가 필요할 정도입니다. 사우디가 이번에 선택한 방향이 그 모델을 참고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현지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사우디가 2030년까지 석유 의존도를 대폭 낮추겠다고 선언한 비전 2030의 핵심도 결국 비석유 부문 수익원 다변화입니다. 이번 비자 비용 인상은 그 큰 그림 안에서 나온 단기 처방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향이 맞는 걸까요
이해는 됩니다.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을 택한 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 방향이 사우디가 표방하는 목표와 실제로 맞아떨어지는 걸까요.
한편에서는 사우디 스폰서 없이도 일부 업종에서 외국인 100퍼센트 지분 소유를 허용하겠다며 해외 투자를 환영한다고 합니다. 관광 산업도 키우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사우디제이션 정책으로 외국인 취업에 제동을 걸고, 이번처럼 성지순례를 위해 입국하는 방문객에게도 60만 원에 달하는 비자 비용을 요구합니다. 매년 수백만 명이 찾는 메카와 메디나를 기반으로 관광 수익을 늘리겠다는 목표와, 성지순례 비자에 높은 비용을 부과하는 현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투자를 유치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싶은 건지, 아닌지. 정책의 방향이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저유가 시대가 만들어낸 궁여지책이라는 점은 이해하면서도, 중장기적으로 이 방향이 사우디 스스로 선언한 비전과 어떻게 맞물려 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