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알카이마에서 E11 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황당한 장면과 마주치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해변 도로 한켠에 대형 비행기 한 대가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주변에 공항도 없고 활주로도 없습니다. 그냥 비행기 한 대가 길가에 서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저게 뭐지. 왜 저기 있지. 얼마나 오래 저러고 있었던 걸까.
알고 보면 이 비행기에는 꽤 복잡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비행기의 정체부터 확인합니다
이 비행기의 공식 명칭은 일류신 IL-76T입니다. 구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설계된 4발 엔진의 대형 전략수송기입니다. 크기를 실감하기 어렵다면 보잉 767 여객기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길이 50여 미터, 날개폭 50.5미터, 높이 14.76미터입니다. 도로를 달리다 이걸 갑자기 마주치면 흠칫할 수밖에 없는 규모입니다.
IL-76은 구 소련의 일류신 설계국이 개발해 1975년부터 실전에 투입된 수송기입니다. 단순한 화물 수송기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처럼 기수 아래에 관측창이 설치되어 있어, 전자 장비 없이도 비포장 활주로나 임시 비행장에서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다목적 군용 수송기입니다. 변경 지역, 즉 인프라가 열악한 곳에서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기종의 핵심 강점이었습니다.
군용기 동체에 호텔 광고가 붙어 있습니다
비행기를 가까이서 보면 더 황당한 장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군용 전략수송기의 동체 양쪽에 팔마 비치 호텔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커다랗게 적혀 있습니다. 현재는 팔마 비치 리조트 앤 스파로 이름이 바뀐 움 알꾸와인의 호텔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바다 건너 차로 24분 거리에 있는 그 호텔 측에서는 자기네 이름이 비행기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비행기는 호텔 광고판도 아니고, 호텔 소유물도 아닌, 그냥 누군가 호텔 이름을 써놓은 정체불명의 군용기가 된 셈입니다.
지금 이 비행기의 실질적인 역할은 오리지날 바라쿠다라는 주류 판매점의 이정표입니다. 움 알꾸와인에 자리한 이 곳은 전 세계에서 들여온 6천여 종 이상의 주류를 판매하는 UAE 북부 지역 최대 주류 판매점으로, UAE 각지에서 술을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장소입니다. E11을 타고 라스 알카이마 방향에서 오면 비행기 앞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면 됩니다. 반대 방향에서 올 경우 비행기를 지난 후 첫 번째 유턴 포인트에서 돌아오면 됩니다.
이 비행기의 이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시리얼 번호 053403072. 이 비행기는 1974년 제조되어 CCCP-86715라는 등록번호로 소련 공군에서 운용됐습니다. 소련이 붕괴된 후인 1992년 7월에는 RA-86715로 러시아 공군에 재등록되었고, 1996년 12월 25일 러시아 공군에서 퇴역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느 군용기의 퇴역 이력과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1997년, 이 비행기는 샤르자를 근거지로 하는 화물 항공사 에어 세스 소속의 El-RDT로 재등록됩니다. 1998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화물 항공사 에어패스 소속 3D-RTT로 또 한 번 이름이 바뀝니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00년 사이에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본사를 둔 센트라프리칸 항공 소속 TL-ACN으로 등록된 것이 마지막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등록 주체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차례 바뀌는 이 과정이 돈세탁처럼 복잡한 신분 세탁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저만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느낌은 근거가 없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상인과의 연결고리
에어 세스와 센트라프리칸 항공, 이 두 항공사는 공교롭게도 같은 인물 소유였습니다. 구 KGB 출신 무기 거래상 빅토르 바우트입니다.
1990년대에 죽음의 상인이라는 별명으로 악명을 떨쳤던 그는 자신 소유의 화물 항공사들을 활용해 이란, 라이베리아, 앙골라, 시에라리온, 서아프리카 반군, 심지어 오사마 빈 라덴에 이르기까지 분쟁 지역 곳곳에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통행량이 적고 감시가 소홀한 외진 공항들을 거점으로 삼아 추적을 피했습니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2005년 영화 로드 오브 워에 등장하는 주인공 유리 오를로프라는 캐릭터의 모델 중 하나가 바로 그였습니다. 2008년 태국에서 체포된 그는 미국으로 인도되어 25년 형을 선고받고 일리노이주 메리언 교도소에서 복역 중입니다.
빅토르 바우트는 1990년대에 샤르자와 라스 알카이마를 거점으로 이 비행기를 포함한 여러 화물 수송기를 운용하며 중동을 통해 동유럽과 아프리카 각지로 물건을 날랐습니다. 그의 악명이 퍼지면서 UAE는 2000년대 초반 그의 입국을 금지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왜 이 비행기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걸까요
현재 IL-76이 놓여있는 이곳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스카이다이빙과 패러슈팅 클럽으로 유명했던 UAQ 에어로돔이 있던 폐쇄된 소형 공항 부지입니다. 유럽인들과 에미라티들이 즐겨 찾던 하늘의 성지였던 이곳은 몇 차례 사고가 발생하고 무허가 운영이라는 문제까지 겹치면서 2010년 무렵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클럽의 일부 강사들은 이후 스카이다이브 두바이와 라스 알카이마의 알자지라 비행 클럽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한때 이 공항을 이용하던 스카이다이버들에게 IL-76은 착지 지점을 찾는 눈에 띄는 랜드마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가 정확히 왜, 어떤 경위로 1999년 어느 날 아침 이 자리에 착륙해서 지금껏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릅니다. 알려진 몇 가지 추측이 있긴 합니다.
첫 번째는 기장이 착륙 장소를 혼동한 사고라는 설입니다. 그런데 기체와 바퀴 상태가 너무 멀쩡합니다.
두 번째는 식당이나 카페로 개조하기 위해 구입했다는 설입니다. 그런데 왜 동체에 이름이 적힌 호텔 측에서는 아무것도 모를까요. 게다가 그 호텔은 한참 떨어져 있습니다.
세 번째는 북부 에미레이트의 다른 공항으로 향하던 중 착륙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연료까지 떨어져 비상착륙했다는 설입니다. 하지만 기체가 이 정도로 멀쩡하다면 연료를 다시 채워 띄우면 됐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네 번째는 누군가 다른 공항에서 가져와 고철로 팔려고 했다는 설입니다. 그런데 왜 20년 넘게 팔지 않고 방치했을까요.
다섯 번째는 퇴역 기념물로 사용하려던 비행기를 2만 달러를 주고 사막에 갖다 놓았다는 설입니다.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다섯 가지 추측 어느 것도 완전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 비행기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는 앞으로도 명확히 밝혀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냥 사막의 랜드마크입니다
결국 이 비행기는 구 소련 군용기에서 무기 밀매상 소유 화물기를 거쳐, 폐쇄된 공항의 랜드마크가 되었다가, 지금은 주류 판매점의 이정표 겸 수호신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지역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한때 하늘을 가르며 스카이다이빙을 즐겼던 추억의 장소 표식이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하고 신기한 풍경이며, 바라쿠다를 찾는 주당들에게는 다 왔다는 신호입니다.
UAE를 여행하다 E11 도로를 달릴 일이 있다면, 사막 한가운데 불쑥 나타나는 이 비행기를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황당하고 흥미롭지만, 이 이야기를 알고 다시 보면 또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